전 L사 최초 여성임원 윤여순 동생은 배우 윤여정이 언니입니다. 최근에 한국 배우로는 최초로 여우 조연상을 수상했습니다.
한국에 돌아온 윤여순은 시간강사로 일하며 기회를 찾아야 했습니다. 어느 날 그녀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모토로라 대학교에서 6개월짜리 프로젝트를 수행할 박사를 구하고 있었던 것이죠. 맡은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끝내게 되죠. 그리고 윤여순의 프로젝트 결과를 지켜본 LG인화원(LG그룹 교육기관) 임원이 그녀를 찾아옵니다. L그룹의 최초 여성임원입니다. 발표가 있는 어느 연구 발표자리에서 연구발표를 하는 저를 본 L그룹 임원의 제안이였죠..
1995년 41살의 늦은 나이에 L그룹의 L.G인화원(교육연수원 )부장으로 입사를 했습니다.윤여순은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맡은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끝내게 되죠.
그리고 윤여순의 프로젝트 결과를 지켜본 LG인화원(LG그룹 교육기관) 임원이 그녀를 찾아옵니다. 1995년, 41살이었던 윤여순은 LG인화원에 부장으로 입사하게 됩니다.
상무.전무.아트센터 대표까지 20년간 승진 길만 걸었습니다.
남편의 학업을 따라서 미국을 갔습니다. 미국은 남편이 장학금을 타면 배우자가 공부할 수 있는 경우여서 석사를 하던 김에 박사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주변에서는 늦은 나이라서 한국에 돌아와서 교수를 하기도 쉽지 않으니 하지 말라고 말리기도 했습니다.
윤여순은 이화여고, 연세대학교, 미국 아이오와 주립대학교에서 교육공학 박사 학위를 딴 엘리트입니다. 남편의 학업을 위해 미국행에 오르며 그녀의 인생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이 공부를 시작하자 ‘유학생 아내’였던 윤여순은 지루한 일상을 보내야 했습니다.윤여순은 우연히 대학 소개 책자를 읽다 특별한 제도를 알게 됐습니다. 미국 주립대학교에는 장학금을 받는 대학원생의 배우자에게 무료로 9학점을 이수할 수 있는 제도가 있었는데요. 남편이 장학금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윤여순도 무료로 강의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영어 공부나 해보자”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공부는 석사를 넘어 교육공학 박사까지 이어졌습니다.
L사 임원이 회사를 설명하는데 기업은 일을 시작하면 결과의 책임을 지는 곳이며 전문성으로도 발전이 가능하다고 설명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저는 <기업이 체질>입니다. 인간적인 깊이도 굉장히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사내에 온라인 교육시스템인 사이버 아카데미를 만들었습니다. 여의도 본사 앞에 통근 버스 수십대가 서는데 전단을 만들어서 홍보도 하고 했으나 새로운 시스템을 받아 들일 준비가 이른 때여서 사표를 쓰려고도 했었습니다.
1999년 연말의 어느날 인사이동의 시기였습니다.
연 종합보고를 받던 고 구본무회장님이 "21세기는 글로벌시대인데 여성임원 한명 안나옵니까?" 하셨습니다. 임원후보 1순위로 오르게 되었습니다. 성과를 물어보신 구회장님은 '매우 미래지향적인 시스템을 구축하셨군요.'라며"딱 깜입니다." 라며 발탁하셨습니다.
윤여순부장의 신문기사입니다. 1천여명의 학생을 거느린 사이버 대학의 총수,사이버 아카데미에서 수천명의 제자를 길러냈습니다.
1995년 부장발탁, 2000년 상무, 2010년 전무, 2011년 아트센터 대표, 2014년 퇴임했습니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 또 다른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직장의 경험을 살려서 할 수 있는 전문직업인 비즈니스 코칭입니다. 자격증도 따며 준비를 한 결과입니다.
직장맘으로 자녀의 교육은 어떠셨는지? 엄마가 필요하다는 날에는 회식을 하고 돌아와 늦은 시간도 딸이 원하는 대화의 시간을 내어 주었다 윤여순임원 어머니의 따님은 디자이너로 스스로 길을 찾아서 직장생활을 잘하고 있습니다.
윤여순 임원, 어머니의 가정교육 회고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윤임원이 초등학교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딸 셋을 홀로 키우신 어머니는 '무엇이든 스스로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말씀하시며 실천해 내는 삶을 살아내셨다. 가장 삶의 모델이 되어 주신 어머니의 삶이 경외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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