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살에 찰스와 결혼하던 모습이다. 찰스는 그때도 카밀라애인이 있었지만 왕실의 반대로 다이애나와 결혼하기에 이르렀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수 있는 자신만의 장점을 부각해가는 패션의 아이콘으로 전세계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매력을 지녔다.
1960년대의 런던은 새롭고 현대적인 젊은이들에 의해 주도된 낙관주의와 쾌락주의가 풍미한 문화혁명의 때였다.
카밀라는 1947년, 런던에서 애슈컴 남작 R. 커빗의 외손녀로 태어나 서식스 지방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1972년, 약혼자 앤드루의 소개로 찰스 왕세자를 처음 만나게 되어 서로 사랑을 느꼈으나 찰스가 입대하자 예정대로 이듬해 앤드루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찰스가 제대하자 다시 연락하여 이내 왕세자와의 혼외 관계를 시작하였다. 남편 앤드루와의 사이에서 아들 톰과 딸 로라를 낳고 1981년, 스펜서 백작 가문의 딸 레이디 다이애나 스펜서가 왕세자빈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지속하였다. 찰스와 다이애나 사이에서의 아들 윌리엄과 해리가 태어난 후에도 이들의 불륜 관계는 해소되지 않았기에 이로 인해 왕세자 부부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어 갔다.
1990년, 찰스와의 은밀한 통화 내용을 녹음한 테이프가 언론에 폭로되어 큰 파문을 일으킨 후에도 지속된 불륜 관계는 결국 1996년 왕세자 부부의 정식 이혼으로 이어졌으며 1997년, 다이애나가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영국 사회에서 이들을 지탄하는 목소리는 하늘을 찔렀다. 그럼에도 이 둘의 불륜 관계는 지속되었고 여러 공식 행사에 함께 참석하여 영국의 언론과 국민들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비극의 주제는 사랑의 다른 모습으로 이어진 결과들이다.
2005년 4월 9일, 많은 논란 속에 찰스 왕세자와 재혼하여 전하(Her Royal Highness)의 경칭과 함께 콘월 공작부인(Duchess of Cornwall)의 칭호를 받았으나 여전히 뜨거운 다이애나의 인기 등을 이유로 민심을 잃었으며 사치로 구설에 올라 비난 여론이 적지 않았다. 아마도 다이애나비의 생존에 활동모습에서 영국인들의 마음에는 다이애나비를 사후에도 휠씬 추앙하는 문화를 읽을 수 있다.
찰스가 왕으로 즉위한 후에는 커밀라가 왕비(Queen Consort)의 칭호를 받을 수 있다는 헌법부의 판결이 있었으나, 하원의 공식적인 반대 의사 표명과 국민들의 여론을 의식하여 왕비에 비해 한 단계 격이 낮은 ‘왕의 배우자’라는 의미를 지닌 빈(Princess consort)의 칭호를 사용하기로 내정하였다. 국민 여론 조사에서도 응답자 1천 503명 중 단지 21%만이 커밀라가 왕비가 되면 기쁘겠다고 대답했고, 56%는 계속 빈의 칭호를 사용하는 게 낫다고 하였다. 이 일은 다이애나비와 윌리엄과 해리에게는 비극적인 삶의 일부가 되었다. 찰스와 커밀라에게는 영국 국민이 어떤 결말을 줄것인지?
그녀는 BBC방송에 출연해 찰스 왕세자의 불륜과 본인의 외도를 폭로했다. 영국을 대변하는 전문가들의 평에 따르면 그때BBC에서 대담을 나누었던 기자는 윤리적으로 정직한 인터뷰를 하지 않았고 다이애너비가 왜곡하여 인식할 수 있도록 조작된 정보를 제공했다고 한다. 올해 그는 그런 사유로 BBC를 퇴사했다. 그러나 그당시 그녀는 이 인터뷰의 파장으로 왕실과의 사이는 완전히 금이 갔고 그 연유로 프랑스에서의 자동차 사고가 누군가의 준비된 위장의 자동차 사고이지만 왕실쪽의 사주에 의한 타살일까? 회자되는 일은 맞침표가 없다. 비운의 영국왕비로 세계는 기억하고 있다.
그녀의 패션은 늘 독특했고 세계 곳곳에 그녀의 펜들은 열광했다 지금 입고 있는 양이 디자인된 붉은색 가디건중에 오른쪽 가슴에 검은 양이 한마리가 있다. 외로운 자신의 존재를 표현한 디자인이다.
그녀를 위해서 제작한 크리스찬 디올백이다.
크리스찬 디올이 왕비의 백으로 제작했고 이 백은 지금도 크리스찬 디올의 다이애나 백으로 명품백으로 전세계 고객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전설의 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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