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외부와 단절된 채 하루하루 스러져가는 영화배우를 구해주세요’라는 글이 올라왔다. 게시물의 작성자와 영화배우의 이름은 공개되지 않았다. 하지만 청원 내용에 상세하게 묘사된 정황에 들어맞는 배우는 딱 한 명, 윤정희(본명 손미자·77)뿐이었다. 그가 10여 년째 알츠하이머로 투병 중이라는 사실은 지난 2019년 남편인 피아니스트 백건우(75)의 인터뷰를 통해서 공개됐다. 국내에서 비공개 치료 중이던 윤씨는 그해 4월 이들 부부가 거주하는 프랑스 파리로 돌아갔다.
백건우와 윤정희는 1976년 결혼 이후 40여 년간 국내외 연주 여행에 빠짐 없이 동행해서 ‘잉꼬 부부’로 불렸다. 하지만 이 청원인의 주장은 딴판이었다. 청원인은 “(윤정희가) 남편과 별거 상태로 배우자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파리 외곽의 한 아파트에서 홀로 외로이 알츠하이머, 당뇨와 투병 중”이라고 주장했다. 또 “배우자와 딸로부터 방치된 채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힘든 투병 생활을 하고 있다. 혼자서 나가지도 못하고 감옥 같은 생활을 한다” “배우자가 자기 아내를 안 본 지 2년이 됐다”고도 덧붙였다. 본지 취재 결과, 이 게시물은 윤씨의 친정 가족이 올린 것으로 확인됐다. 이 게시물은 온라인으로 퍼지면서 이들 부부의 이름이 포털 사이트 검색어 1~2위에 올랐다. 7일 낮 현재 3000여 명이 이 청원에 동의했다.
배우 윤정희(오른쪽)가 2011년 프랑스 파리에서 문화예술공로훈장을 받은 뒤 남편 백건우와 함께 활짝 웃고 있다. 백건우도 2000년 수상해서 한국인 부부가 프랑스의 문화예술 훈장을 받은 첫 사례가 됐다. /AP 연합뉴스
이틀 뒤인 7일 백씨의 소속사인 공연기획사 빈체로는 백씨와 상의를 통해서 “해당 내용은 거짓이며 근거 없는 주장”이라는 반박 입장문을 냈다. 빈체로는 “부부의 딸 아파트 바로 옆 집에서 가족과 법원이 지정한 간병인의 따뜻한 돌봄 아래 생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면서 “주기적인 의사의 왕진과 치료와 함께 편안하고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남편 백건우와 윤씨의 친정 가족들이 2년 전부터 프랑스에서 ‘성인 후견인’ 자격을 놓고 법적 분쟁을 벌였다는 사실도 뒤늦게 확인됐다. 성인 후견인은 장애와 노령 같은 이유로 정상적 판단 능력이 떨어지고 사회 생활을 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경우, 법원에서 후견인을 지정할 수 있는 제도다. ’100세 장수 시대'에 알츠하이머와 노년 건강 문제가 화두로 떠오르면서 성인 후견인 제도 역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영평상 공로상 수상한 배우 윤정희와 동행한 피아니스트 백건우
백씨와 프랑스에서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 중인 딸 진희씨는 2019년 7월 윤씨의 성년 후견인 자격을 신청했다. 하지만 석 달 뒤인 10월 프랑스와 미국에 살고 있는 윤씨의 친정 동생 3명이 프랑스 법원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소송을 냈다. 소송 과정에서 백건우와 윤씨의 친정 동생들이 후견인 자격과 면접권, 재산 관리 등의 문제를 놓고 갈등을 벌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1년여간 진행된 소송은 지난해 11월 프랑스 파리고등법원에서 백씨 측의 승소로 끝났다. 당시 법원은 딸 진희씨를 후견인으로 선임하고 “윤정희의 재산과 신상을 관리하도록 한다”고 판결했다. 프랑스에서 법적 다툼이 끝나고 불과 석 달 뒤에 청와대 국민청원이 올라온 셈이다.
백씨는 지난해 11월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주최의 ‘아름다운 예술인상’ 시상식에서 아내 윤씨를 대신해서 공로예술인상을 받았다. 당시 백씨는 “귀한 공로상을 받는 이날, 윤정희는 영화의 나라 프랑스에서 가족들과 좋은 친구들의 보살핌으로 평화롭고 평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소감을 말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당시 그는 중간중간 말을 잇지 못한 채 고개를 떨궜다. 현재 파리에 체류 중인 백씨는 국내 독주회 일정을 위해 11일 귀국할 예정이다. 윤씨의 친정 가족들은 본지 통화에서 “현재 별도의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성년 후견인 제도
질병과 장애, 노령 같은 정신적 제약으로 사무 처리 능력이 부족한 성인들을 위해 후견인을 선임하는 제도. 본인이나 배우자 등의 청구에 따라 법원이 후견인을 선임하며, 후견인은 재산 관리, 법적 대리 등을 맡는다.
남편 백건우의 입장
남편 백건우는 친정과의 후견인 법정다툼의 파리법정서 승소했다.
청화대의 국민청원의 청원 내용
백건우 소속사 빈채로의 입장문
2019년 5월 윤정희가 파리로 돌아가며 시작된 분쟁은 2020년 11월 파리고등법원의 최종 판결과 함께 항소인의 패소ㅗ 마무리되었습니다.
오드리 헵번 같다고 했던, 윤정희의 '리즈시절'
12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23살에 데뷔한 배우. 문희, 남정임과 함께 1960~197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라 불렸던 배우 윤정희는 이제 기억이 사라지고 있다. '알츠하이머'를 앓는단 소식이 알려져서다. "여배우로서 나이를 먹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던 윤정희는 닮고 싶은 배우로 잉그리트 버그만과 로미 슈나이더, 오드리 헵번을 꼽았었다. "삶이란 게 젊을 때도 아름답지만, 나이 들어서도 근사한 것 아니냐"며. 때론 한국의 '오드리 헵번'이라 불리기도 했지만, 윤정희는 그냥 윤정희였다.
미스리(1971년작)
무릎꿇고 빌련다(1972년작)
두줄기 눈물 속에(1971년작)
시로의 섬(1988년작)
영화'시'에서는 윤정희배우가 알츠하이머환자의 간호를 하는 역을 맞기도 했다.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배우 윤정희 부부는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함께 겪었다. 1972년 독일 뮌헨 올림픽의 축하 공연으로 윤이상의 오페라 ‘심청’이 세계 초연될 당시 이들은 처음 만났다. 영화 ‘효녀 심청’의 현지 상영차 독일을 방문했던 윤씨는 남편과의 첫 만남을 이렇게 회고했다. “오페라 극장 계단에 순수하게 생긴 한국 남자가 있었다. 자리를 잘 몰라 그분에게 좌석을 물었더니 친절하게 안내해줬다.” 그 청년이 백건우였다.
이들 부부는 1976년 3월 재불(在佛) 화가 이응로의 집에서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신랑과 신부는 웨딩드레스 대신 한복을 입었고, 예물도 백금 반지 한 쌍이 전부였다. 파리에 신혼집을 차린 이들 부부는 이듬해 이응로의 부인 박인경의 권유로 당시 공산권이었던 유고슬라비아의 자그레브(현재 크로아티아의 수도)로 연주 여행을 떠났다가 납북(拉北) 위기를 겪었다. 당시 신변의 위협을 느낀 백씨 부부는 가까스로 자그레브 주재 미 영사관으로 탈출한 뒤 무사히 파리로 돌아왔다.
1980년대부터 백씨는 프로코피예프·라흐마니노프·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전곡 음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음반 같은 굵직한 녹음과 연주로 세계 음악계의 주목을 받았다. 윤씨도 23세에 영화 ‘청춘 극장’으로 데뷔한 뒤 300여 편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아 1960~1970년대 문희·남정임과 더불어 ‘1세대 트로이카’로 불렸다.
하지만 남편의 공연 당일이면 아내 윤씨는 언제나 무대 뒤편 대기실에서 남편의 구두를 닦고 연주용 연미복을 매만졌다. 그는 “백건우 비서 노릇은 나 아니면 아무도 못할 거야”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윤씨는 2010년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에서 주연을 맡아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과 카이로 영화제 평생 공로상 등을 받았다. 공교롭게도 ‘시’에서 그가 맡은 배역은 알츠하이머 환자 역할이었다.
2019년부터 배우 윤정희 알츠하이머 투병
영화가 아니라 현실에서 윤씨가 알츠하이머로 투병 중이라는 사실은 남편 백건우의 2019년 인터뷰로 뒤늦게 확인됐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