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재평가 받을 수 있다. 최악의 상황에서 나라를 구한 애국의 아이콘이 아니었을까.
12월 19일 방송된 tvN '설민석의 벌거벗은 세계사'에는 이집트 클레오파트라 7세 강의가 진행됐다.
역사 전문가 설민석은 "이집트를 대강국으로 만든 천재 지략가, 패기도 엄청나고 마지막 파라오인 사람의 이야기를 할 예정이다"고 귀띔했다. 은지원은 "여자라면 팜므파탈 대표 클레오파트라 아니냐"고 정답을 맞혔다. 이집트인 새미는 "이집트 클레오파트라들 중에 제일 유명하다. 7세로 알고 있다"고 말했고 은지원은 "클레오파트라가 7명이라고?"라면서 놀라워했다. 설민석은 "클레오파트라는 여성 왕족에게 불러줬던 이름이다. 한국 단군 할아버지 있잖냐. 단군이라는 직함이 1,500년 이상 세습됐다. 그렇게 생각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설민석은 "클레오파트라 7세는 고대 로마인들에게 이렇게 묘사됐다. '미친 여왕', '구역질 나는 더러운 남자들에게 둘러싸인', '근친상간 왕조의 후예', '이 불경한 여자는 두꺼운 화장에 가려진 요부', '빛나는 가슴' 등 외설적으로 표현됐다"며 "한 로마 정치가는 '목석과 같은 남자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말했다"며 동전에 새겨진 클레오파트라 7세 얼굴을 공개했다.
이어 "클레오파트라 7세는 쥐고 흔든 역사가 엄청나다. 단순히 미모 때문이었을까. 진짜 매력은 얼굴보다 지성이었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어렸을 때부터 9개 국어를 했다. 전 세계 데이터가 모여있는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이 어린 클레오파트라 7세의 놀이터였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방대한 독서와 학자들과의 토론으로 화술을 발전시켰다. 그것을 바탕으로 외교를 펼쳤다. 조기 교육으로 능력을 키운 거다"고 말했다.
근친혼을 해야했던 이유는? 이집트는 남녀 공동 통치만 가능했다.
설민석은 "클레오파트라 7세는 세 남자를 손에 쥐고 역사를 바꿨다. 클레오파트라 7세 첫 번째 남자는 클레오파트라 7세 친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다. 프톨레마이오스가 10살일 때 클레오파트라 7세는 18살이었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친동생과 결혼했다. 근친혼을 해야 했던 이유가 있다. 이집트 법도는 남녀 공동 통치만 가능했다. 여자가 파라오가 되려면 남자가 필요했다. 신을 낳으려면 신과 신이 결혼해야잖냐. 왕권 강화를 위해 근친혼을 한 거다"고 전했다.
권력은? 형제는 가족도 아니다. 남보다 못한 사이다.
설민석은 "클레오파트라 7세가 친동생과 권력을 나눠 갖고 싶겠냐. 역사를 공부하면서 느끼는 것은 동서양 막론하고 권력 앞에 형제는 가족도 아니다. 남보다 못한 사이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정치도 잘했다.
클레오파트라가 정치를 할때 이집트의 기근상황은? 2,000년 전 앞서간 혁신 정치
클레오파트라 7세가 파라오가 됐을 때 이집트는 대기근으로 혼란에 빠진다. 곡물 가격이 높아지며 화폐가치가 떨어졌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일부러 화폐가치를 더 떨어트렸다. 이에 수출이 증가했고 국채를 발행했다. 국채를 산 시민들의 돈으로 경제적 위기를 극복했다. 2,000년 전 앞서간 혁신 정치"라고 극찬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질투는 늘어가고? 클레오파트라 7세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클레오파트라 7세 명성이 높아질수록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질투도 늘어났다며 "누나를 내쫓기 위해 염문설을 뿌린다. 로마의 고위 관리와 정을 통했다는 소문을 유포해 적국의 관리와 바람난 여왕으로 만들었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서아시아로 도망 다니는 신세로 전락했다.
두번째 남자 카이사르를 만나는 운명
그때 클레오파트라 7세는 두 번째 남자 카이사르를 만난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 함께 로마 공화정(왕이 아닌 개인 또는 집단이 정치하는 것) 시대의 실세였다. 카이사르는 장군으로 필요한 업적을 위해 영토확장을 계획했고 북방 원정을 떠났다. 9년 동안 전쟁을 하며 갈리아 정복에 성공했지만 위기 의식을 느낀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를 암살할 것을 다짐한다. 하지만 전투에 패한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도주한다"고 말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카이사르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이집트로 도망 온 폼페이우스를 죽인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카이사르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이집트로 도망 온 폼페이우스를 죽인다. 이어 카이사르에게 목 잘린 폼페이우스를 선물로 보낸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라이벌, 애증의 관계였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보고 분노했고 이집트를 장악했다.
클레오파트라 7세(22살),카이사르(51세)의 심장을 뺏은 이유는? 다시파라오에 오르기,=30살 차이
이것을 본 클레오파트라 7세는 '내가 카이사르를 만나서 심장을 뺏으면 다시 파라오에 오를 수 있겠다'고 생각했고 양탄자에 숨어 카이사르를 만났다. 카이사르는 51살, 클레오파트라 7세는 22살. 약 30살 차이였다. 동생이 돌아온 클레오파트라 7세를 보고 왕관을 집어던지며 분노했다. 이에 군대를 모아 클레오파트라 7세를 치자고 했지만 카이사르 군대가 승리했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카이사르를 이용해 최고 권력이 오른다-첫남자+남동생은 시체로 발견
이후 프톨레마이오스는 시체로 발견된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카이사르를 이용해 최고 권력이 오른다"고 밝혔다.
카이사르 정치를 위해 다시 로마로-클레오파트7세 아들을 낳았다고 편지
설민석은 "카이사르는 정치를 위해 다시 로마로 돌아간다. 독재관으로 지내며 자리를 잡아가고 있을 때 클레오파트라 7세가 아들을 낳았다고 편지를 보낸다.
클레오파트라 7세,아들을 통해 로마를 지배하려
클레오파트라 7세는 아들을 통해 로마를 지배하려는 욕심이 있었다.
클레오파트라 7세를 너무 사랑한 카이사르-로마 신전에 클레오파트라 7세 동상을 세웠다. 로마국민의 극노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 7세를 너무 사랑했다. 궁전에 클레오파트라 7세를 머물게 하고 수많은 명문가를 연결해 줬다. 도가 점점 지나쳐서 로마 신전에 클레오파트라 7세 동상을 세웠다. 그것도 비너스 옆에 말이다"며 "로마 사람들이 극대노 했다. 그래서 원로원 600명 의원들은 카이사르 암살 계획을 세운다.
카이사르의 왼팔-브르투스 암살 당함
카이사르 왼팔이었던 브루투스가 허벅지에 칼을 꽂으며 23번 자상을 입고 암살 당한다"고 설명했다.
카이사르가 유언장에 적어놓은 후계자는 친누나의 손자인 옥타비아누스-클레오파트라7세의 배신감-이집트로 돌아감
설민석은 "카이사르가 유언장에 적어놓은 후계자는 친누나의 손자인 옥타비아누스였다. 이 소식을 들은 클레오파트라 7세는 배신감을 느꼈다. 이에 다시 아들과 이집트로 돌아갔다.
클레오파트라 7세만큼 배신감을 느낀 건 카이사르 오른팔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 7세를 본 안토니우스는 사랑에 빠졌다.
클레오파트라 7세만큼 배신감을 느낀 건 카이사르 오른팔 안토니우스.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 동방원정을 결정했다. 동방 가는 보급 창고로 이집트를 선택한 뒤 이집트로 향했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안토니우스를 만나 주지 않다가 황금으로 뒤덮인 금, 진홍빛 돛, 은으로 된 노를 통해 안토니우스를 환영했다. 금으로 장식된 별실에 누워있는 클레오파트라 7세를 본 안토니우스는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은 눈이 맞았고 전쟁은 안 하고 매일 통돼지 8마리씩 구워 먹으며 사치를 부렸다"고 덧붙였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전쟁의 결과는?
이어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 힘이 더 커지기 전에 제압하려고 전쟁을 일으켰다. 옥타비아누스 군대는 막강했고 클레오파트라 7세와 안토니우스는 병사들을 버리고 전쟁터를 떠나 도망갔다.
클레오파트라7세의 영원하지않은 권력욕은 죽음으로,사랑하는 안토니우스는 자살로 생을 마감
이에 병사들의 신뢰를 잃은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협상을 제안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 7세가 파라오에서 내려오고 너는 내가 처형하겠다. 이 제안을 받으면 전쟁 안 하겠다'라고 말했다. 그때 클레오파트라 7세 죽음 소식이 들렸다. 안토니우스는 슬픔에 빠져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배를 찔렀는데 클레오파트라 7세 죽음이 헛소문이라는 걸 알게 됐다. 이에 마지막으로 클레오파트라 7세를 보기 위해 들것에 실려갔다. 이를 본 클레오파트라 7세는 죄책감과 슬픔에 자신의 얼굴을 비벼 안토니우스 피를 닦았다.
안토니우스가 사랑의 연인 크레오파트라 7세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안토니우스는 '꼭 목숨은 부지하세요. 클레오파트라 7세'라는 말과 함께 죽었다"고 말했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어떻게 죽었을까?
설민석은 "클레오파트라 7세는 만신창이가 됐다. 마지막 사랑 안토니우스가 죽고 난 후 자신도 세상을 떠났다. 어떻게 죽었는지는 잘 모른다. 뱀이 자신의 몸을 물게 해서 떠났다고 추정 중이다. 뛰어난 지략과 화술로 영웅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조국 부흥을 위해 몸을 던졌던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 그의 죽음 후 300년 왕조 역사는 종지부를 찍었다"
재평가 받을 수 있는 클레오파트라 7세-최악의 상황에서 나라를 구한 영웅!
"클레오파트라 7세를 부정적인 인물로 여기지만 재평가 받을 수 있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로마에게 위협받는 이집트의 왕권 강화를 위해 동생과 결혼했다. 이후 기회를 잡기 위해 카이사르 아이를 출산했고 이집트 부흥을 위한 원대한 계획까지 세웠다. 최악의 상황에서 나라를 구한 애국의 아이콘, 영웅이 아니었을까"라고 전했다.
새미는 "클레오파트라 7세는 머리가 좋았다. 다만 운이 클레오파트라 7세 편이 아니었다. 클레오파트라 7세가 아니면 그 자리에 올라갈 사람이 없었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최선의 선택을 하면서 노력한 것"이라고 공감했고 이혜성은 "역사 속 여성들은 남성들의 그늘에 가려져 있거나 외모만 부각되는 경우가 많아 아쉬웠다. 새로운 시각을 얻게 돼서 좋다"고 강의 만족감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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