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페르소나의 달리 코치입니다.
30일 방송된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는 ‘추석-조선의 힙스터’ 특집으로 꾸며지며 이수영 회장이 출연했습니다.
광원산업 이수영 회장은 평생 모은 766억을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기부한 인물입니다.
이수영 회장은 '어떻게 큰돈을 벌게 되었냐'는 질문에 "80년대 해직기자다. 언론 통폐합 때 일자리를 잃었다"고 밝혔고요.
그러면서 "당시 퇴직금으로 500만 원을 받았다. 안양 농협에 가서 융자를 받아서 트랙터를 샀다"며 "젖소 10마리로 낙농업을 시작해 돼지 1000마리와 젖소 수십 마리 규모로 사업을 번창시켰다. 그 돈을 종잣돈으로 사업을 시작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수영 회장은 이후 5층 임대사업을 필두로 백화점의 1/3을 소유하게 된다. 그는 "여의도가 개발될 때 복덕방 아저씨가 여의도 한가운데에 백화점을 지었어요. 그 사람이 두 번 부도를 당하니 입주자들이 장사를 못해 돈을 털고 나왔지요. 은행에서 돈 회수를 해야 하니 21차 경매까지 갔습니다. 88년에 여의도 백화점을 사고 들어갔습니다. 1990년도에 임대가 됐지요. 그 사람들이 증권 예탁원인데 한 달 임대료가 2700만원이었습니다. 그게 들어와서 돈더미에 올라 앉았다"고 사업가로 성공의 씨앗이된 스토리를 말했습니다.
또 88년 하천 모래를 채취해 팔았다고도 밝혔습니다. 이수영 회장은 "허허벌판인데 평당 5원에 샀습니다. 하천 부지로 알고 샀는데 갔더니 좋은 땅이더라. 건설 붐이 일었다"고 말했습니다.
⊙ 목장일과 부동산 투자로 평생 모은 돈… KAIST 설립 이래 최고 기부액
⊙ 獨身으로 살다 여든 넘어 晩婚, “남편, 전깃불 꺼주고 등에 로션 발라줘”
⊙ 애지중지 자란 4남 4녀 中 막내… 부모님의 베푸는 삶 물려받아
⊙ ‘이수영과학기술재단’ 설립 약속… 과학기술로 富强해지는 나라 꿈꿔
李壽榮
1936년 서울 출생 / 경기여중·경기여고·서울대 법학과 / 서울신문·현대경제일보(現 한국경제신문)·서울경제 기자 / 광원목장 설립. 現 광원산업 회장, 카이스트발전재단 이사장
메마른 신문지에 일순간 윤기(潤氣)가 돌았다. 전염병에 폭정(暴政)에 경기폭락에 신음하는 소식만 어찌나 가득한지, 넘길 때마다 어석어석 소리가 나던 차였다. 칙칙한 기사들 사이, 눈에 띈 제목이다. ‘평생 일군 재산 766억원, KAIST에 기부’. 지난 7월 23일, 한 일간지 귀퉁이에 조그맣게 실린 단신(短信). 반쯤 읽다 ‘그래, 아직 살 만한 세상’이라며 페이지를 넘기려는데, 한 구절이 발목을 잡았다. ‘여든 넘어 첫사랑과 결혼했으며…’ 잠깐, 뭐라고?
문장을 다시 확인했다. 그러자 활자 몇 개에서 슬며시 꿀이 배어나오더니, 사회성 기사가 갑자기 로맨스 수필로 바뀌었다. 거액의 기부자이자 당대(當代)의 로맨티스트, 만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알고 보니, 삶 자체가 장르를 넘나드는 사람이었다. 서울대 법대를 나와 재계 출입 기자를 했다. 법도 알고 경제도 안다. 연차가 쌓일 무렵부터는 시골에 내려가 주말목장을 운영했다. 서울 토박이면서 농촌도 안다. 목장으로 번 돈으로 건물에 투자를 했다. 부동산도 잘 안다. 큰돈을 벌었고, 그 돈을 교육에 기부했다. 벌 줄도 쓸 줄도 안다.
지난 9월 3일, 여의도 맨해튼빌딩에 있는 이수영 회장의 집무실(이라고 하기에는 단출한 작은 방)을 찾아갔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주인공보다 먼저 들어가 앉았다. 뭐부터 물어봐야 할까. 머릿속에 수십 개의 물음표가 ‘저요, 저요!’ 하며 떠다녔다. 방울방울 피어올랐던 질문들이 문고리 돌아가는 소리에 ‘팟’ 하고 터져버렸다. 변죽부터 울렸다.
― 까마득한 후배 기자가 인터뷰하러 온 모습을 보니 어떠세요.
“재밌어요, 귀엽고.”
― 기자 이수영이라면 지금의 이수영 회장한테 가장 먼저 어떤 질문을 던졌을까요.
“글쎄요, 둘 다 나니까, 퀘스천이 없죠. 뭐가 제일 궁금하려나.”
여든 넘어 첫사랑과 결혼?
모두가 같은 마음일 거다. 다음 중 더 궁금한 항목을 고르시오. 1번, 766억 원을 어떻게 모았을까. 2번, 여든 넘어 결혼을 마음먹은 계기. 근소한 차이로 후자(後者)에 무게가 실릴 거라 믿는다. 채 다듬어지지 않은 문장들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회장님, 늘그막에, 결혼하는 것이…’ 언감생심. ‘늘그막’은 실례다. 그렇다면 ‘말년’은 어떨까. ‘말년에 초혼이신데…’ 아, 절레절레. 그렇다고 초년은 아니니까 괜찮지 않을까. 아니다. 불혹을 앞둔 기자도, 여든을 넘긴 이 회장도 같은 ‘오늘’을 살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사람들이다. 새파랗게 어린 쪽이 상대 인생을 초, 중, 말년으로 구획 짓는 건 오만(傲慢)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물어야 하나. 1936년생이라 올해로 85세인 그가 2018년, 83세에 첫사랑과 결혼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가 가장 궁금한데, 그걸 어떻게 물어야 하나. 이럴 때는 살짝 단순한 척하는 것도 방법이다. ‘이 친구, 뭘 좀 가르쳐줘야겠네’ 하는 생각이 들도록.
― 신혼 재미는 어떠십니까, 하하.
“우리 영감? 첫사랑이라고 기사가 났던데, 첫사랑 아녜요. 그거 오보(誤報)예요.”
― 앗!
“영감 혼자 나를 짝사랑한 거야. 나는 그때 사귀던 남자가 있었어요.”
들어보니 이랬다. 이 회장은 서울대 법학과에 1956년 입학했다. 경제기획원 사무관과 서울고검 수석부장을 지낸 남편 김창홍 변호사와는 동창인데, 당시 동기생이 300명이나 돼 학창시절에는 남편의 존재를 몰랐다고 한다. 동창이라는 말이 ‘첫사랑’으로 와전(訛傳)된 셈이다.
졸업 후 십수 년 만에 다시 만나
― 그럼 대학교 때는 서로 교류가 전혀 없었습니까.
“나는 그를 알지도 못했어요. 게다가 남편은 중간에 산속으로 고시 공부한다고 들어가버렸으니까. 대학교 때 혼자 나를 몰래 좋아한 거지. 촌(경북 영주)사람이라서 표현도 못 하고.”
― 언제 다시 만난 건가요.
“(졸업하고) 십수 년이 지나 동창모임에서 만났어. 골프 모임이었는데, 영감이 검사 출신이라 골프를 잘 쳐. 팔십 넘은 양반이 지금도 장타(長打)를 쳐요. 200야드씩 나가고 그래요. 나는 못 치잖아. 티를 꽂아주고 공도 올려주고 그러더라고. 잘 가르쳐주기에 오죽하면 ‘남자캐디’라고 별명을 붙였는데, 가만히 보니까 나한테 은근히 잘해주는 거야. 원래 동창들이 나한테 잘해줘요. 근데 이 사람은 도가 좀 넘더라고.”
― 정확히 어떻게 도를 넘던가요.
“나 혼자 골프장까지 오가기 힘드니까 몇 번 나를 태워줬는데, 어느 날은 차 안에서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거지.”
― 결혼하자고요?
“아니야. 그런 얘긴 안 했어. 법과대 들어왔는데 내가 그렇게 예뻐 보였다는 거야.”
― 그래서 결혼하자는 얘기는 누가 먼저 했습니까.
“(나한테) 딱지 맞을까 봐 말은 못 하고 그저 ‘내가 재취(再娶)하기에는 나이가 많은데 이제 혼자 어떡하냐’, 이런 말만 하는 거야. 남편은 사별(死別)을 했거든. 그러다 어느 날 끝내 얘기해버리더라고.”
82세 婚姻의 의미
― 결혼한 지 만 2년이죠. 보통 이맘쯤에는 자녀계획을 세우고, 앞으로 어떤 집을 살지를 얘기하는데요. 회장님의 경우에는 주로 어떤 이야기를 하시나요.
“지금 관악산 끝자락에 집을 지어서 살고 있어요. 남향인데, 공기가 아주 달아요. 지하수를 먹는데 그게 또 약수야. 너무 좋아요. 그렇게 살면서 내가 영감 호강시켜주는 거요, 이런 얘기들을 하지.”
― 평생 독신으로 살다 여든 넘어 한 결혼, 아직 부족해서 그런지 짐작이 안 됩니다. 무엇이 팔십 년 동안 움직이지 않던 마음을 결단 내리게 했나요.
“영감이 혼자 되고 나서 나중에 골프장에서 보니까 말도 못해. 너무 불쌍한 거야. 골프장 밥이 맛있게 나와. 보니까 밥을 와그작와그작 먹는 거예요. 아이고, 집에서 밥도 제대로 못 먹는구나 싶었지.”
― 음….
“내가 누굴 참 잘 먹여요. 골프장 갈 때도 맛있는 찹쌀떡을 사 가지고 친구들 나눠주기도 해서 인기가 많단 말이야. 영감이 그것도 잘 받아먹고 그래서 참 가엽더라고.”
‘사랑’의 다양한 모양 중 하나로 이해했다. 어딘가 원초적인 감정선이 어쩐지 모성(母性)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 흔히 10년 사귀고 결혼해도 몰랐던 서로의 모습을 알게 된다고 하지요. 삶의 혜안(慧眼)이 많이 쌓였을 테니 아무래도… (그런 건 없지 않을까요).
“말도 마. 어쩔 때는 사기를 당했다 싶어.”
― 하하하, 신혼 초기에 많이 싸우는 건 매한가지군요.
“이 사람이 장가오기 전에는 아주 예의가 발랐어요. 처음 데이트할 때는 말이야, 손수건을 싹 다려와 가지고 어디 앉을 때 요만한 걸 탁 펴서 깔아주고 그랬어. 밥도 잘 사줬고요. 그런데 이제는 나한테 밥 달라고 큰소리 빽 친단 말이야. 아주 거꾸로 돼버렸어요.(웃음) 나한테 아주 잘하는데, 경상도 남자라 목소리가 커.”
이불 덮어주고 로션 발라주고
― 특유의 무뚝뚝함 말씀이죠.
“나보고 여자답지 않다고 야단을 치려고 하는데, 나는 절대 안 잡히지. 집에 혼자 있다가 영감이 오는 발소리를 듣고 내가 ‘누구요’ 하면, 영감이 ‘내가 이 집 주인이다’ 이러면서 들어와요. 웃긴 얘기 해줄까요. 친한 친구인 경기여고 동기 하나도 경상도 남자랑 결혼했어. 그 친구가 오래전에 해준 얘기야. 남편이 어느 날 결혼한 딸이 잘 살고 있는지 보고 오라고 했대요. 보고 와서 ‘그래 어찌 살고 있던가’ 해서 ‘사위가 당신하고 아주 똑같더라’고 하니까, 남편이 혼잣말로 ‘죽일놈…’ 그랬다는 거 아니에요.”
희한했다. 이런 얘기를 하면서도 이 회장의 얼굴에는 계속 화색(和色)이 돌았다.
― 다툼에도 궁합이 있다고 하는데, 어떠신가요.
“우리가 둘 다 뒤끝이 없어요. 서로 왁! 했다가 바로 ‘저녁 뭐 먹을까?’ 이래요. 그리고 밥 먹으면 서로 과일 챙겨주고.”
― 어쨌거나 좋으신가 봅니다. 좋아 보입니다.
“어제는 너무 피곤했어요. 안마의자에서 TV 보다가 비도 오고 하니까 그냥 잠들어버렸지요. 그러다 새벽에 잠깐 깼는데 이불이 덮어져 있더라고. 얇은 담요인데 아주 보드라운 게 있어. 요즘 같은 환절기에 그거 덮으면 따뜻하고 좋아.”
― 아이고, 자상하시네요.
“목소리 큰 것만 빼면 지극정성이지. 전깃불도 꺼줘요, TV도 꺼주고. 혼자 살 때는 전깃불 끄는 게 너무 힘들었거든. 변소 가다가 자빠지지 말라고 작은 불도 켜놓고. 그뿐이야? 목욕하고 나면 건조하지 말라고 등에 로션도 발라줘.”
― 부군께서는 회장님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든다고 합니까.
“남자들은 미운 여자를 싫어해. 내가 그렇게 예뻤다잖아!”
예뻤던 그 시절
4남 4녀의 막내였다. 선친인 이원승(李元承)씨는 연안(延安) 이씨 가문에 자부심이 대단한, 영락없는 ‘옛날 사람’이었다. ‘여자는 숟가락 숫자만 세면 된다’고 할 정도니 말 다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친구 집에 다녀오더니 ‘딸 하나만 더 낳자’고 부인에게 애원을 했다고 한다. 교사인 친구의 막내딸이 마음에 쏙 든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게 태어난 게 이 회장이다. 자연히 날 때부터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과장 좀 보태, 땅에 발 붙일 틈이 없이 살았다. 하도 안겨 지내서다. 딸 또한 받은 사랑에 부응했다. 말도 잘 듣고, 공부도 잘했다. 명문인 경기여중, 경기여고에 이어 서울대 법대에 턱턱 합격했다.
주위 사람들에게 수십, 수백 번 들은 질문 중 하나가 ‘왜 법조인이 되지 않았느냐’인데, 그때마다 쿨하게 답한다. “그야 시험에 떨어졌으니까.”
뒤이어 나오는 질문도 수백 번 들었다. ‘하고 많은 중 왜 기자였냐.’
“내가 날 때부터 허약했어. 게다가 사시 공부하느라 몸이 많이 축났지. 낙방 후 낙심해 집안에서만 지내다가 안 되겠다, 해서 영어학원에 등록하러 갔어요. 1963년이었지. 안내판에 ‘기자 모집 공고’가 있더라고. 지원해보자 싶었어. 그때 법대 남학생 동기도 여러 명 응시했는데, 나 혼자만 붙었어요.”
그렇게 1963년부터 1980년까지, 17년간 기자로 살게 됐다. 주로 재계를 출입했다.
― 그때는 여성 기자가 거의 없었죠. 시쳇말로 ‘남초’ 직장에서 고충도 많았을 것 같은데요.
“여자가 있다고 해도 주로 편집부, 교정부, 문화부에 배치됐어요. 재계 출입은 남자 기자들에게도 녹록지 않은 자리였지. 재벌들이 자기 치부(恥部)도 있었고, 배고파서 손 벌리는 기자들도 많아서 서로 상극(相剋)이었거든.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지지 않으려고 내가 악착같이 했어. 센 척을 한 거죠. 동료 중에는 나한테 뭘 읽어보라고 건네줬는데, 그 안에 야한 사진을 넣어서 내 반응을 보려고 한 사람도 있었어. 속으로는 놀랐는데 눈도 끔뻑 안 했어.”
그때 집무실 오른편에 걸린 흑백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기자 시절의 이수영 회장. 그에게 이병철 회장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그 옆에는 정주영 회장이 서 있다.
眼光이 뿜어져 나오던 이병철
― 그런 환경에서도 재계 핵심 인물들과 어울리셨군요.
“머리를 많이 썼지. 상대방이 만남을 거절 못 하게 할 사람이 누가 있는지, 빨리 파악했다고. 그렇게 사람들이 다리를 많이 놔줬어요. 저 사진은 1980년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서 찍은 거야. 이병철 회장이 ‘이수영 기자, 이리 와’ 하며 정주영 회장과의 사이에 서게 한 뒤 어깨동무를 했지.”
― 여러 번 만난 사이 같아 보입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70년대 경제발전하는 데 몇 번의 도약기가 있었어요. 그 확장기 시절에 재벌 총수 릴레이 인터뷰를 했는데 첫 주자가 이병철 회장이었어. 그 후에도 몇 번 봤어.”
― 당시는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 파장이 있던 때 아닌가요. 그런데도 기자를 만나줬나요.
“처음에는 비서실에 정식 섭외요청을 했지. 몇 달을 기다렸는데도 안 되는 거예요. 아, 이 방법밖에 없나 싶어서 머리를 굴렸어. 박정희 대통령의 초대 재무장관이던 박동규 장관이 취임하던 날, 내가 견습기자로 배석한 적이 있었어. 이후 박 장관이 은퇴하고 방직협회장으로 갔는데 그때 만날 일이 있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지. 골프를 치신다기에 누구랑 치냐고 하니까 홍재선 전경련 회장과 자주 친대. 홍 회장이 서울대 법대 선배기도 해서 언제 한번 나도 소개시켜달라고 했지. 나중에 홍 회장한테 이병철 회장과 연결을 부탁한 거야.”
― 첫인상이 어떻던가요.
“시간을 칼같이 지켰어. 시계를 보고 있는데, 초침이 정시를 가르키자마자 나타났어요. 나는 인터뷰 내용을 받아 적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눈이 마주쳤는데, 안광(眼光)이 뿜어져 나오는 걸 느꼈어요. 마치 맹수가 상대의 폐부(肺腑)를 꿰뚫어보는 것 같았지. 당시 이병철 회장 방에 ‘事業報國’(사업보국)이라는 글씨가 걸려 있었어요. ‘사업을 해서 나라에 보답하자’는 뜻이야. 그만큼 나라를 생각하며 경영을 아주 철저히 한 사람이에요. 직원들도 아주 후하게 대접했지. 그때만 해도 삼성에 들어가면 3년 안에 집을 다 샀으니까. 본받을 게 많은 사람이지.”
― 인터뷰가 상당히 긴장됐겠는데요.
“떨리지는 않았어.”
― 지금으로 치면 이재용 부회장 인터뷰 정도 되려나요.
“이재용 부회장은 기자를 안 만나는 사람이 아니에요. 이병철 회장은 한국 기자를 아예 안 만났다니까. 한비 사건으로 너무 두드려 맞아서.”
― 요즘에도 삼성이 고초(苦楚)를 겪는 듯 보입니다.
이수영 회장을 만나기 이틀 전인 9월 1일, 삼성 경영권 불법 승계 의혹을 수사해온 검찰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재판에 넘겼다. 이로써 이 부회장은 2017년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사건으로 구속기소된 이후 3년6개월 만에 새로운 법정 다툼을 시작하게 됐다.
“말이 안 되는 처사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어요. 2019년 삼성 매출이 314조원이에요. 국내 GDP(국민총생산)의 16.4%를 차지하는 액수야. 국가 경제성장에 가장 크게 기여하고 있는 기업이라는 거야. 왜 자꾸 죄인 취급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과학기술이 발전해야 국가가 부강해지는 법인데 말이야.”
가장 기억에 남는 기사
이 회장은 정주영 회장과의 일화도 들려줬다. “아침 7시에 인터뷰 약속을 잡을 정도로 아주 부지런하고 머리가 좋은 애국자”로 기억했다. 정 회장과는 1975년 유럽·중동 경제사절단 동행취재를 한 적도 있다. 그는 기자의 옷차림을 가리키며 “내가 중동 출장 갔을 때 딱 그렇게 입었어. 파란 남방에 청바지”라고 했다.
―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시네요. 17년간 쓴 기사 중에 뭐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까. 이양구 동양그룹 회장 인터뷰로 특종상을 받으셨던데요.
“동양시멘트가 부도 나서 이양구 회장이 채권자 600명에게 쫓기는 신세가 됐을 때야. 잠적한 이 회장을 인터뷰한 거지. 눈물의 인터뷰였어.”
― 어떻게 설득하셨나요.
“원래 몇 번 봐서 아는 사이였는데 완전히 잠적해버려서 찾기가 쉽지 않았어. 당시 위치를 1시간마다 한 번씩 바꿨다고 하더라고. 수소문을 해보니, 최측근 두 명은 연락이 된대. 목사 하나, 승려 하나야. 그중에 목사가 내 친구 아버지의 친한 친구인 거예요. 친구에게 부탁해서 그 목사에게 이양구 회장 만나고 싶다는 메시지를 전달해달라고 했어. 다음 날 새벽 5시에 전화가 오더군요.”
― 특종이다, 싶었겠네요.
“잠도 덜 깬 사진기자를 데리고 부랴부랴 택시를 탔지. 택시 안에서 사진기자가 누구 인터뷰냐고 묻는데 말을 안 했어. 택시기사가 이양구 회장의 채권자일 수도 있잖아?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이양구 회장을 만났는데 울더라고. 채권자한테 미안하다고.”
― 결과적으로 이 회장에게도 나쁘지 않은 기사였겠네요.
“이양구 회장 이미지가 많이 회복됐지. 동정 여론이 생겼으니까. 이 회장이 후에 나한테 굉장히 고마워했어요. 백만대군을 얻은 것 같다는 말을 하면서.”
― 맛있는 것도 사주던가요.
“청평호수에 있는 자기 별장에서 쏘가리매운탕을 대접했어. 그 덕분에 그날 이양구 회장 첫사랑 얘기도 취재했지.”
있는 그대로 쓰는 기자
― 그런 굵직한 기사를 쓰는 데 ‘서울대 법대 출신’이라는 사실은 어느 정도 기여했나요.
“굉장히 큰 기여를 했지. 경기여고, 서울대 법대 출신이라고 하면 적어도 잡배는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어느 정도 신뢰를 받고 시작하는 게 있었다고.”
― 그러면 서울대 법대 출신이 아닌 기자는 어떡해야 합니까.
“그것 말고도 (무기가 될 수 있는 게) 많지. 정직하고 겸손하고 들은 대로 쓰면 돼. 내가 그랬어. 그리고 꼬집기보다 칭찬을 많이 했어. 기업 흠집 내는 기사를 쓰고 나서 손 내미는(협찬 요청) 기자들이 많았는데, 난 그런 게 없었어요. 이게 다 아버지 덕이야. 나 대학 3학년 때 필운동에 40평짜리 한옥을 해줬거든. 그때만 해도 내가 판검사가 될 줄 알았으니까. 판검사가 되려면 청렴하고 정직해야 하잖아. 그러려면 나부터 아쉬울 게 없어야 된다는 주의셨지.”
― 아… 그러니까, 학생 때 벌써 사대문 안에 한옥 한 채가 있었다는 거군요. 무주택자는 어떡합니까.
“성실하면 돼요. 운도 따라야 하고.”
이미 가진 게 많았지만, 그를 만든 건 실제로 8할이 성실함이었다.
사업가로 변신
증권가에 풍문처럼 도는 얘기가 있다. 조금 슬픈 이야기다. 언젠가 금융감독원에서 기자들을 대상으로 내부자 거래 의혹을 털어보려고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웬일. 몇몇 용의자들의 계좌를 열어봤는데, 죄다 마이너스인 것이 아닌가. 내막을 알고 보니, 좋은 종목에 기똥차게 모여든 건 사실이지만 하나같이 팔 때를 놓쳤더라는 후문이다. 그렇게 사건은 조용히 덮였다고 한다. 진위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그만큼 기자가 ‘의외로’ 물정에 어두운 사람이라는 걸 방증하는 일화다.
― 기자가 사업해서 돈 벌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발로 뛰었어요. 아주 치밀하게 움직여야 돼.”
― 기자생활을 하던 중 목장으로 돈을 버셨다고요.
“아버지가 시집갈 때 장롱 사라고 준 돈이 있었어. 나는 장롱 살 일이 없잖아? 그걸로 경기도 안양에 땅을 조금 샀어요. 그땐 평(3.3m2)당 5원, 10원 이랬어요. 언젠가 퇴직하면 농사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했거든.”
당시 농업과 공업이 고루 발전해야 한다는 ‘농공병진(農工竝進)’에 크게 공감하던 차라고 한다.
“빈 땅을 놀리기가 그렇잖아. 콩을 심었지. 주말마다 배낭 하나 메고 간 거야. 주말농장식으로.”
― 조그만 콩 심던 땅이 어떡하다 농장이 된 겁니까.
“《주간한국》에 김훈 국장이라고 있었어요. 이재(理財)에 아주 밝은 사람이야. 필운동 우리 집 이웃이라 친오누이처럼 지냈어요. 김 국장이 부인이랑 용인에서 돼지농장을 했어요. 놀러 오라기에 갔지. 한겨울에 점퍼 입고 돼지가 새끼 낳는 걸 받고 있더라고. 아이고, 돼지 새끼가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 너무 예쁘다고 하니까 김훈이 그래. ‘돼지가 왜 돼지인지 키워보면 안다’고. 사료를 어찌나 먹는지, 좀 도와달래. 돼지를 좀 데려가는 게 돕는 거래. 그래서 돼지 두 마리를 데리고 온 거야.”
1971년, 목장 이름은 광원(光原)으로 지었다. 나탈리 우드가 출연한 영화 〈초원의 빛〉에서 딴 이름이다.
소 팔고 모래 팔아 부동산 투자
평일엔 기사를 쓰고, 주말엔 농장을 가꿨다. 그 생활을 9년이나 했다. 그러면서 동네 사람들에게 수모도 많이 당했다. 서울대 법대 나와 신문사 기자까지 했다는 처녀가 시골에 내려와 트랙터를 몰며 선머슴처럼 다니니, “어쩌다 저렇게 됐느냐”면서 혀를 찼다. “저러다 변을 당하지”라는 소리도 들었다. 그러는 사이 돼지 두 마리가 1000마리로 불었다. 젖소도 15마리 생겼다. 1980년, 신문사를 퇴직하고는 목장 일에만 매달렸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이었다. 농촌에서 성공한 사람들 얘기가 방송을 자주 탔다. 이 회장도 ‘성공한 목장 주인’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TV에 출연했다. 새마을운동 강연에도 초청됐고, 정부에서 주는 ‘양축협 노력상’도 받았다.
위기도 있었다. 1979년 돼지파동이 일었다. 돼지값이 폭락했다. 이때 운이 작용했다. 마리당 3만원도 못 받던 돼지를 군(軍)에 납품해 5만원에 팔았다. 우유파동도 닥쳤다. 그때는 기질을 발휘했다. 농림부 장관에게 “초등학생에게 우유를 무료로 나눠주자”고 제안했다. 아이들 건강도 챙기고 젖소 농가도 살리자는 취지였다. 실제로 정책으로 받아들여졌다.
― 목장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까.
“경인고속도로 나들목(IC)으로 수용되면서 없어졌지. 목장 일을 못 하게 되고는 그 땅의 모래를 채취해 팔았어요. 전국에 건설 붐이 일던 때라 모래가 요긴하게 쓰였어.”
기자를 그만둔 지 8년 되던 해인 1988년, 목장 수용 보상금과 소·돼지와 모래 판 돈을 얼추 모아봤다. 은행에 갔더니 담당 직원이 여의도백화점(현 맨해튼빌딩) 5층에 인수 물건이 나왔다고 귀띔했다. 가격은 16억5000만원. 그만한 돈은 없었지만, ‘2년 거치 5년 분할’이라는 매수 조건이 마음을 흔들었다. 게다가 계약금 1억5000만원은 치를 형편이 됐다. 주변에서는 무모하다며 만류했다. 하지만 ‘망해도 내가 망한다’는 생각이었다. 인수를 강행했다. 그해, 부동산 전문 법인인 광원산업이 생긴 배경이다.
임대료 등 수익 사업으로 차츰 지분이 늘었다. 결국 맨해튼빌딩 3분 1이 그의 소유가 됐다. 건물 전체의 관리 권한도 쥐었다. 그러면서 미국 부동산에도 투자했다. 참여정부 말, 300만 달러까지 해외투자가 허용된 게 기회였다. 2000년 로스앤젤레스의 소셜시큐리티 건물을 매수했다.
KAIST에 기부
듣고 보니 사업 성공에는 네 가지가 필요했다. 업종을 택하는 안목과 끌어나가는 능력, 그리고 운과 인복(人福).
― 지금은 각종 제재로 인해 부동산으로 부자가 되기에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우리도 세금만 몇억씩 나와요. 성실 납부 기업이라 세무조사는 한 번도 안 받았지만. 위기가 기회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절망할 필요는 없어요. 정신만 바짝 차리고 있으면 돼, 이 정부가 영원한 건 아닐 테니까.”
― 그렇게 일군 수백억원의 재산을 기부한 거군요.
“돈 벌어서 내가 가져갈 것도 아니잖아요. 자식 있어도 자식한테 안 줬을 거야. 그건 자식이 망하는 길이야. 미국은 건물 살 때 상속자를 꼭 기재해야 등기가 넘어가요. 나는 상속자가 없잖아. 누굴 적어. 기부해야겠다 싶었지.”
그 무렵 우연히 서남표 당시 KAIST(카이스트) 총장이 TV에서 “국가 발전에 과학기술의 힘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을 봤다. 통감했다. 2012년 처음 KAIST에 80억원을 기부한 데 이어 2016년 10억원 상당의 미국 부동산을 유증(遺贈·유언을 통한 재산기부)하기로 한 뒤 실제 기부했다. 지난 7월 23일에는 KAIST 대전 본원에서 개교 이래 최대 규모인 676억원 가치의 부동산을 출연해 ‘이수영과학교육재단’을 설립하기로 약속했다. 그렇게 총 기부금이 766억원에 이른다.
― 기부하러 처음 KAIST에 가던 날, 아침 풍경이 궁금해요.
“심장이 쿵쾅거렸어. 그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릴 정도였어요.”
― 왜 그랬을까요.
“설렘 때문에. 설레더라고.”
독창적 과학지식과 이론 정립 연구 지원
KAIST 측은 이수영과학교육재단에서 나오는 돈으로 독창적인 과학지식과 이론을 정립할 수 있는 연구를 지원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우선 ‘KAIST 싱귤래리티 교수’를 선정하기로 했다. 첫 10년간 논문·특허 중심의 연차실적평가를 유예해 마음껏 연구하도록 한 뒤 이후 실적을 평가해 10년을 연장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이 회장은 “KAIST에서 국내 최초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수 있도록 아낌없이 지원하겠다”고 했다.
“과학자들은 경영 능력이 없지만 나는 경영을 알잖아요. 그걸 잘 알려주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과학기술재단을 만들기로 한 거야. 기부한 돈이 누수 없이 제자리에 잘 쓰일 수 있도록 돕겠다는 취지예요. 이 돈으로 과학이 발전하고 그 과학의 힘으로 국가가 발전하고 결국 나라가 부강해졌으면 좋겠어.”
― 아무리 거부(巨富)라도, 다들 기부하며 살지는 않습니다.
“어릴 적부터 집안 분위기가 그랬어. 엄마는 전쟁 통에서도 문 앞에 가마솥을 걸어놓고 쌀로 죽을 끓여 이웃에게 나눠줬어요. 어린 나이였는데도 누군가에게 내가 가진 것을 나눠준다는 일이 흐뭇하고 보람된 거라는 걸 알았지.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생 때 아침마다 라일락이나 장미를 한 다발씩 주면서 ‘일찍 학교 가서 교탁에 꽂아두라’고 했어요. 일제 때는 사회 전반이 어두웠잖아. 그 꽃 덕분에 우리 교실에는 항상 향기가 났어. 그때 담임인 이마무라 선생이 그런 나를 참 예뻐했지. 처녀 선생이었는데, 지금은 아마 돌아가셨을 거야. 언젠가 꼭 다시 뵙고 싶었는데…. 일본인 개개인이 다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
기부 뒷이야기
― 기부 뒷얘기도 궁금합니다. 안타깝게도 아직 성숙한 기부문화가 자리 잡지 못했는지, 기부 소식이 알려지면 그렇게 청탁 전화가 많이 온다고 하던데요.
“많이 오지. 전화가 많으면 하루에 100통씩 와요. 지금도 지인의 자식들이 도와달라고 한없이 전화를 걸어. 그 아이들이 한때 장관의 아들이거나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들이 자식 교육비를 나한테 대달라고 하는 거야.”
― 어떻게 대응하십니까.
“대답 안 하면 돼.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얘기잖아.”
― 그러면 인간관계가 끊기지 않나요.
“끊으면 되지? 남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손 벌리는 건 나빠요. 그 당시에 아버지가 장관을 했으면 준(準)재벌보다 낫다고. 그런 집안에서 태어나, 아버지 재산을 다 해먹고 나한테 손을 벌리면 되나.”
― 기부에 회의(懷疑)가 든 적은 없습니까.
“잘 걸러내면 되지. 그건 내 몫이야.”
― 2018년에는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훈하셨죠. 이낙연 당시 총리가 수여했는데, 동문이지요.
“한참 후배지. 《동아일보》 사회부에 있었고. 개인적인 친분은 없어. 나보다 한참 후배인데 자기가 총리라고 해서 나한테 훈장을 준 거지.(웃음)”
― 요즘 대권 주자로도 언급되는데 어떻게 보시는지요.
“사람은 겸손해. 나대지 않고 말 함부로 안 하고. 지금 아마 본인은 도(道)를 닦는 기분일 거야. 목탁 두드리고 있을 거라고. 여당의 다른 인물이나 문 대통령과는 결이 다르다고 봐요. 호남 출신이라는 제약을 좀 받을 거야.”
“과거가 무슨 소용이야?”
― 요즘 하루 일과는 어떠세요.
“아침부터 바빠요. 영감이 새벽 4시에 일어나.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직접 아침을 차려줘요. 무공해로 상추, 고추, 가지 심어논 거 따서 해 먹고 컴퓨터 켜서 이메일 들여다보고, 사무실 나와서 빌딩 관리하고 관련된 법률 문제도 들여다보는 거지. 그러다 보면 하루가 다 가서 저녁에는 녹초가 돼요. 나는 무리하면 안 돼.”
탄탄대로 같았던 그의 삶. 굽이굽이에는 곡절도 많았다. 여의도백화점 인수 무렵에는 건물 관리비라는 이권을 노린 조직폭력배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은 적도 있다. 한 달간 지방으로 피신해야 했다. 그때 무리한 탓에 신장암 판정을 받았다.
― 건강은 어떠세요.
“내가 신장암 수술을 했잖아. 왼쪽을 떼어냈고, 3년 전에는 간암을 앓았어요. 고주파로 암세포 죽이는 수술을 세 번했어. 그래서 약을 많이 먹어요. 영감이 시간마다 매번 챙겨줘서 먹는 거야. 고혈압·당뇨·간 약에 골다공증 약, 영양제까지 열 몇 개를 먹어요. 때마다 ‘약 먹었어? 약 먹었어?’ 한다고. 그러곤 물을 떠다주고 약을 갖다 줘.”
― 음… 좀 더 젊을 때 만났더라면 어땠을까요. 그런 얘기는 안 합니까.
“안 해요. 현재와 미래가 중요하지, 과거가 무슨 소용이야. 지나간 건데. 우리는 ‘과거는 묻지 마세요’야. 지금의 이수영은 내 경험, 선택들의 총합이야. 어느 것 하나 다른 걸 선택했다면 지금의 나는 없겠지.”
― 태몽은 뭐였습니까.
“자라꿈. 맑은 물에 자라 네 마리가 있었대요. 내가 나중에 자식을 넷 나을 줄 알았대. 근데 하나도 못 낳았지.”
“이 정도면 괜찮은 삶을 산 것 같아”
― 자식이 없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습니까.
“시집을 못 갔으니까 자식이 없는 건 당연한 거지. 내 자식 키우는 손이 노니까 뭐라도 보탬이 돼보려고 아이 셋을 데려다가 키워봤는데 연(緣)이 좋지 않았어.”
― 입양을 하셨던 겁니까.
“여자 혼자 사는데 스캔들이 걱정되잖아. 호적에는 못 올렸어요. 나중에 사생아가 셋이나 있다, 이렇게 돼버릴까 봐. 제대로 키워보려고 했는데 다들 나와 연이 좋지 않았어. 어디선가 잘 살면 좋겠어.”
― 이름이 세련됐습니다. 누가 지었습니까.
“제 할아버지가 아버지한테 현몽(現夢)을 해서 ‘나중에 막내 낳으면 수영이라고 지으라’고 했대요. 난 정말 사랑 많이 받고 자랐어. 그때만 해도 선풍기가 없었어. 엄마가 밤새도록 내 머리맡에서 부채질을 해줬다고. 그러면서 자장가처럼 ‘우리 수영이, 명이 길고 복을 많이 받아라’고 했어요. 그 말소리가 아직도 귀에 맴돌아.”
― 수영이, 복 많이 받아라…. 자장가 같던 어머니의 기도문이 이뤄진 것 같나요.
“욕심이야 한이 없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은 삶을 산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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