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중국 베이징 차오양구에 위치한 SKP백화점. 6층짜리 건물이 모두 명품 브랜드로 채워진 이 백화점은 중국 내 명품 마니아들의 성지 중 하나다. 이날도 평소처럼 에르메스나 샤넬 매장 앞에 고객들이 줄을 서 있었다. 루이비통 매장 앞에서 만난 40대 여성 고객은 "예전에는 해외여행을 가서 쇼핑을 자주 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요즘은 국내에서 주로 명품을 구입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세계 명품시장의 큰 손
중국은 세계 명품 시장의 '큰손'이다. 지난해 중국인의 명품 구매 규모는 3500억위안(약 63조원)에 달한다. 2025년이면 세계 명품 시장 매출의 절반이 중국에서 나올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명품 업체들이 중국에 가장 공을 많이 들이는 이유다. 이처럼 뜨거운 중국 명품 시장에서 이상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바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국정 운영의 핵심 사상으로 내세운 '공동부유(共同富裕)' 때문이다. 내년 장기 집권을 노리고 있는 시 주석이 '다 같이 잘살자'는 구호를 다시 전면에 내세운 것은 중국 내 양극화가 극에 달했다는 판단 때문이다. 공산당은 공동부유를 달성하기 위해 소수의 손에 지나치게 집중된 부를 하위 소득계층에 재분배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중국 경제 전문가인 사이토 나오토 다이와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니혼게이자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시 주석의 공동부유 사상은 사회적·경제적 평등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중국 최고위층이 보유하고 있는 부를 압박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중국 공산당의 '부자 때리기'는 명품 시장을 급속히 위축시킬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중국 정부가 부의 재분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명품 업계에 불길한 징조"라고 평가했다.
미국 투자은행 제프리스의 분석에 따르면 중국 명품 시장은 1만명에 불과한 슈퍼리치가 전체 매출 중 약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문제는 이 같은 중국 내 슈퍼리치가 공산당의 표적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중국에서 호텔업을 하고 있는 장 모씨(48)는 "최근 시 주석의 공동부유 사상 강조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중국 상류층 단체 채팅방에서 관련 뉴스가 대거 공유됐다"며 "아직 부의 재분배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이 발표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소비심리가 위축될 조짐이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중국 정부의 특권계층에 대한 규제 강화가 명품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게 명품 업계의 판단이다. 컨설팅 업체 베인앤드컴퍼니에 따르면 중국 정부가 2012년 특권층을 상대로 반부정부패 캠페인을 벌이자 다음해 전 세계 명품 업체의 매출 증가율은 2%에 그쳤다. 이전 3년간 매년 평균 10% 이상 고성장했던 명품 업체의 성장이 중국 변수에 의해 가로막힌 것이다.
중국이 명품 시장을 단속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글로벌 명품 업계 시가총액도 일주일 만에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루이비통·디올 등 브랜드를 보유한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의 시총은 지난 16일 4143억6000만유로에서 23일 3781억7000만유로로 감소했다. 같은 기간 에르메스 시총도 1631억1000만유로에서 1560억6000만유로로 줄어들었다. 또 구찌·입생로랑 등 브랜드를 보유한 케링의 시총도 일주일 새 1107억5000만유로에서 990억4000만유로로 감소했다. 세 회사의 시총이 일주일 만에 총 549억5000만유로(약 75조2040억원) 사라진 셈이다.
향후 세계 명품 업계에 닥칠 공포는 중국 공산당이 내놓을 공동부유 사상의 구체적인 액션플랜에 달려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중국 공산당과 정부는 공동부유 원칙을 천명하면서도 이를 달성하기 위한 정책적 방법론은 아직 제시하지 않은 상태다.
명품 업계가 가장 걱정하는 시나리오는 사교육 시장에 대한 규제처럼 사실상 시장 자체를 와해시키는 극단적인 규제안이다. 중국 정부는 과도한 사교육이 양극화의 한 원인이라는 판단 아래 사교육을 사실상 금지시키는 초강경 규제안을 발표했다.
중국 지도부는 명품 브랜드가 대부분 미국과 유럽 등 서방국가 기업인 데다 지나친 과소비는 국민 정서에 반하는 만큼 갈수록 커져가는 중국 내 명품 소비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중국 공산당이 어떤 방식으로든 상류층의 명품 소비에 대해 제동을 걸 것이라는 관측이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중국 정부가 코로나19 이후 경기 회복을 위해 내수 살리기에 적극 나서고 있는 만큼 명품 소비에 대해 극단적인 규제책을 꺼내들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실제 중국 공산당은 공동부유를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성장을 포기한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댓글